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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뭇이란? 마티니 속 그 술을 얼음 잔에 따로 마셔 보는 법

상수역 1번 출구에서 걸어서 7분, 홍대와 합정 사이에 블러드앤샌드라는 바가 있습니다. 가게 페이지에는 스스로를 '베르뭇테리아'라고 소개하고, 메뉴판의 '베르뭇 (잔)' 칸에는 카르파노 안티카 포뮬라부터 릴레 블랑까지 열 가지 이름이 도수와 산지, 향과 함께 적혀 있습니다. 마티니나 네그로니를 마셔 본 분이라면 이미 베르뭇을 마셔 본 셈인데도 베르뭇만 한 잔 따로 시켜 본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베르뭇은 칵테일 재료이기 전에 얼음 잔에 그대로 마시는 술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베르뭇이 어떤 술인지, 스페인에서는 언제 어떻게 마시는지, 베르뭇테리아에서 첫 잔을 무엇부터 고르면 되는지를 블러드앤샌드와 이따갈게 지도에 오른 바들이 가게 페이지에 적어 둔 안내로 정리합니다.
베르뭇은 와인에 쓴쑥과 허브를 우리고 도수를 높인 술입니다
베르뭇은 와인에 쓴쑥을 비롯한 허브와 뿌리, 향신료를 우리고 알코올을 더해 도수를 높인 강화 와인¹입니다. 이름부터 쓴쑥²을 뜻하는 독일어 'Wermut'를 프랑스식으로 읽은 것이라, 쓴쑥이 이 술의 뼈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지금도 이 기준을 규정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포도로 만든 원료가 전체 양의 75% 이상이고 쓴쑥 계열 식물로 특유의 맛을 내야 베르뭇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도수는 14.5% 이상 22% 미만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팔리는 베르뭇은 대부분 16에서 18% 사이라서 9에서 14% 정도인 보통 와인보다 조금 셉니다.
¹ 강화 와인(fortified wine) 와인에 증류한 알코올을 더해 도수를 높인 와인입니다. 블러드앤샌드는 베르뭇을 "와인에 주정이나 오드비로 도수를 높인 강화 와인"이라고 소개합니다.
² 쓴쑥(wormwood) 쑥과 같은 아르테미시아 속 허브로, 학명은 아르테미시아 압신티움입니다. 쓴맛이 강하고 예전에는 위장병에 좋다고 여겨 약초로 썼습니다. 압생트도 같은 식물을 쓰지만 압생트는 도수가 높은 증류주이고 베르뭇은 와인이라 서로 다른 술입니다.
지금 같은 베르뭇은 178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시작됐습니다. 약초를 공부한 안토니오 베네데토 카르파노가 왕궁 맞은편 자기 와인 가게에서 머스캣 와인에 허브와 향신료를 섞어 내놓았고, 이것이 달콤한 붉은 베르뭇의 시작으로 꼽힙니다. 블러드앤샌드 메뉴판에 있는 카르파노 안티카 포뮬라와 푼테 에 메스가 모두 이 카르파노 집안에서 나온 베르뭇입니다.
붉은 베르뭇과 드라이 베르뭇은 맛이 어떻게 다른가요?
베르뭇은 오랫동안 두 갈래로 나뉘어 왔습니다. 붉은색에 단맛이 도는 쪽(이탈리아어로 로쏘, 프랑스어로 루즈)과 맑은 색에 달지 않고 쌉쌀한 드라이 쪽입니다. 같은 붉은 베르뭇이라도 나라마다 결이 달라서, 블러드앤샌드는 스페인 베르뭇을 "이탈리아산보다 덜 쓰고 프랑스산보다 덜 달아서 섞기보다는 바로 마시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블러드앤샌드 메뉴판은 잔마다 바디³와 도수, 산지, 향을 적어 두어서 처음 보는 이름이라도 비교하기 쉽습니다. 메뉴판에 적힌 내용 그대로 몇 잔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³ 바디(body) 술을 입에 머금었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입니다. 라이트 바디는 물처럼 가볍게, 풀 바디는 진하고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 바디 | 잔 (산지·도수) | 메뉴판에 적힌 향 |
|---|---|---|
| 라이트 | 돌린 드라이 (프랑스 샹베리·17.5%) | 흰 꽃, 레몬 제스트, 허니콤 |
| 미디엄 | 돌린 루즈 (프랑스 샹베리·16%) | 트로피컬 과일, 허브, 시트러스 |
| 미디엄 | 푼테 에 메스 (이탈리아 토리노·16%) | 자두, 오렌지, 바닐라, 콜라 스파이스 |
| 풀 | 카르파노 안티카 포뮬라 (이탈리아 토리노·16.5%) | 바닐라, 카라멜, 허브의 쌉싸름한 단맛 |
| 풀 | 곤잘레스 라 코파 로호 (스페인 헤레스·15.5%) | 버터스카치, 코코넛, 허니 아몬드 |
드라이 베르뭇은 레몬과 꽃 쪽으로, 붉은 베르뭇은 바닐라와 말린 과일 쪽으로 간다고 보면 메뉴판이 훨씬 쉽게 읽힙니다. 베르뭇도 와인이라 병을 연 뒤에는 냉장고에 두고 몇 주 안에 마시는 게 좋아서 집에서 여러 병을 열어 두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잔을 비교해 보기에는 베르뭇을 잔으로 내는 바가 편합니다.
스페인에서는 점심 전에 얼음 잔으로 마십니다
블러드앤샌드의 부제 'la hora del vermut(라 호라 델 베르무트)'는 '베르뭇 아워'라는 뜻입니다. 스페인에서는 주말 점심을 먹기 전, 대개 정오에서 오후 2시 사이에 동네 바에 모여 차가운 베르뭇을 한 잔씩 마십니다. 1950년대에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옮겨 오면서 일요일 미사와 점심 사이에 한 잔 하는 습관이 자리 잡았고, 바르셀로나에서는 "베르뭇 하러 가자(fer un vermut)"가 그냥 한잔하러 가자는 말로도 쓰인다고 해요. 70~80년대에는 맥주와 와인에 밀려 어르신들이나 마시는 술로 여겨졌다가 2009년 무렵부터 다시 인기를 얻었고, 지금은 베르뭇을 여러 가지 갖춘 베르뭇테리아⁴에서 마시는 사람도 많습니다.
⁴ 베르뭇테리아(vermutería) 베르뭇을 중심으로 내는 스페인식 바입니다. 통에서 바로 따라 주는 곳도 있고, 올리브나 통조림 해산물 같은 가벼운 안주를 같이 냅니다.
마시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얼음을 채운 짧은 잔에 붉은 베르뭇이면 오렌지 조각과 올리브 두어 개를, 드라이나 화이트 베르뭇이면 레몬 조각을 넣습니다. 도수를 조금 낮추고 싶으면 탄산수를 살짝 붓고, 곁들이는 안주는 올리브와 감자칩, 힐다⁵처럼 짭짤하거나 기름진 것이 많습니다. 스페인 베르뭇은 단맛이 있는 편이라 짭짤하고 기름진 안주와 잘 어울린다고 합니다.
⁵ 힐다(gilda) 절인 고추와 안초비, 올리브를 이쑤시개 하나에 꽂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안주입니다.
블러드앤샌드는 밤 8시에 문을 열어서 스페인처럼 점심 전 한 잔은 아니지만, 시그니처 메뉴 '라 호라 델 베르무트'로 스페인 베르뭇 한 잔에 올리브와 칩스를 담은 작은 접시를 함께 냅니다. 이 가게에서 베르뭇을 시키면 기본으로 차갑고 단단한 얼음에 베르뭇을 붓고 스파클링 워터를 더해 주시는데, 탄산 없이 온더록으로 마시고 싶으면 주문할 때 말씀드리면 된다고 합니다.

첫 잔은 이 순서로 고르면 됩니다
베르뭇 이름을 하나도 몰라도 주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블러드앤샌드는 바 자리에 앉으면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먼저 여쭤보고 골라 주신다고 적어 두었으니, 아래 네 가지를 차례로 말하면 됩니다.
- 단맛과 쓴맛 중 어느 쪽이 편한지 말합니다. 달콤한 술이 좋으면 붉은 베르뭇에서, 쌉쌀하고 깔끔한 쪽이 좋으면 드라이 베르뭇에서 시작합니다.
- 가벼운 잔에서 진한 잔으로 옮겨 갑니다. 두 잔 이상 마실 생각이라면 라이트 바디로 시작해 풀 바디로 넘어가면 잔마다 달라지는 무게감을 차례로 느낄 수 있습니다.
- 얼음과 탄산수로 시작합니다. 하이볼처럼 마시는 기본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고, 맛을 더 또렷하게 느끼고 싶으면 다음 잔은 온더록으로 바꿔 봅니다.
- 짭짤한 안주를 곁들입니다. 블러드앤샌드는 기본 안주로 초콜릿과 프레첼을 단짠으로 맞춰 내고, 따로 시킬 수 있는 올리브와 칩, 치즈와 샤퀴테리도 메뉴판에 있습니다.

블러드앤샌드는 베르뭇과 함께 이탈리아 허브 리큐르인 아마로⁶도 잔으로 내는데, 단맛과 쓴맛이 함께 있어서 식사를 마친 뒤에 많이 마시는 술이라고 소개합니다. 베르뭇을 식전에, 아마로를 식후에 한 잔씩 두면 한자리에서 두 술의 쓰임을 같이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⁶ 아마로(amaro) 이탈리아어로 '쓴'이라는 뜻의 허브 리큐르입니다. 여러 허브와 뿌리, 껍질을 술에 우려 만듭니다.
마티니와 네그로니 안에서도 베르뭇이 맛을 정합니다
베르뭇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면 베르뭇이 들어간 칵테일을 골라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블러드앤샌드라는 가게 이름도 1930년 『The Savoy Cocktail Book』에 처음 실린 같은 이름의 클래식 칵테일에서 왔는데, 위스키와 체리 리큐르인 체리 히어링, 베르뭇, 오렌지를 섞어 도수 14%로 내십니다. 가게는 아메리카노와 스푸모니, 네그로니 스발리아토처럼 도수 5~17%의 가벼운 식전주 칵테일도 따로 묶어 두었습니다.
다른 바 메뉴판에서도 베르뭇이 어떤 잔에 들어가는지 보면 쓰임이 갈립니다. 한남동 소코의 드라이 마티니에는 진과 드라이 버무스, 오렌지 비터스가, 네그로니에는 진과 캄파리, 스위트 버무스가 들어가서 같은 베르뭇이라도 드라이와 스위트가 잔의 성격을 정합니다. 청담동 제스트의 '글레이즈드 맨해튼'은 호밀 위스키와 피티드 스카치에 이탈리안 버무스를 더하고, 연남동 트라이싸이클의 마티니 '올리브, 영'에는 모스카토 블렌드 베르무트가 들어갑니다. 버무스, 베르무트, 베르뭇은 모두 같은 술을 가게마다 다르게 적은 이름입니다. 칵테일 바에서 취향을 말하는 법은 칵테일 바에서 처음 주문하는 법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베르뭇 한 잔에도 토리노의 약초 가게와 스페인의 일요일이 담겨 있습니다
쓴쑥을 우린 약용 와인에서 시작해 토리노 왕궁 앞 와인 가게를 거쳐 스페인의 일요일 점심 전 한 잔이 되기까지, 베르뭇은 마티니 잔 속 몇 방울보다 훨씬 긴 이야기를 가진 술입니다. 블러드앤샌드 사장님은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손님도 편하게 마시도록 메뉴판에 바디와 향을 적어 두고 하이볼처럼 가볍게 내십니다.
가기 전에 블러드앤샌드 가게 페이지에서 사장님 페르소나에게 "베르뭇은 어떤 술이에요?", "쓴맛이 덜한 베르뭇은 어떤 거예요?"처럼 물어보면 열 가지 잔 중 어디서 시작할지 미리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밤 8시에 열어 새벽까지 하고 연중무휴이며, 라스트오더는 일~목 03:30, 금·토 04:30입니다. 베르뭇이나 아마로를 잔으로 내는 다른 바를 알고 계시다면 이따갈게에 추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