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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이 없는데 뭐라고 하죠? 위스키 바 처음 가는 사람을 위한 안내

분당 미금역 뒷골목의 아일라발리에는 메뉴판이 없습니다. 긴 바 테이블에 앉으면 뒤쪽 벽 전체를 채운 위스키 선반이 보이는데, 어느 병이 어떤 맛인지도 얼마인지도 적혀 있지 않아서 처음 온 손님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사장님은 메뉴판을 일부러 두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향과 오늘 쓸 예산만 말하면 그 안에서 잔을 골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이따갈게 지도에 오른 위스키 바와 위스키 리스트가 긴 바 다섯 곳의 안내로 첫 주문에 건넬 말과 마시는 방식, 라벨 읽는 법을 차례로 정리합니다.
첫마디는 좋아하는 향과 오늘 쓸 예산입니다
위스키 이름을 몰라도 주문은 할 수 있습니다. 아일라발리 사장님이 손님에게 먼저 묻는 것도 피트¹ 향을 좋아하는지, 셰리 캐스크²의 진하고 달콤한 쪽인지, 버번 캐스크의 바닐라 쪽인지, 아니면 가볍게 마시고 싶은지입니다. 여기에 "오늘은 두세 잔 정도, 이만큼 쓰려고요" 하고 예산을 붙이면 사장님이 그 범위 안에서 재미있는 잔을 찾아 주십니다. 바텐더들은 좋아하는 도수를 말해 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독한 술이 부담스럽다면 그 말도 같이 하면 됩니다.
¹ 피트(peat) 풀과 이끼, 나무뿌리가 물에 잠긴 땅에서 오랜 세월 천천히 썩어 쌓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위스키 원료인 보리 몰트를 말릴 때 땔감으로 썼고, 그 연기가 몰트에 배어 위스키에 훈연 향이 납니다. 지금은 대부분 전기 열풍으로 말려서 스카치위스키도 피트 향이 없는 쪽이 많고,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에는 지금도 피트를 때는 증류소가 많습니다. 피트의 세기를 ppm이라는 숫자로 적기도 하는데, 대개 몰트를 잰 값이라 완성된 위스키가 얼마나 스모키한지는 그대로 알려 주지 않습니다.
² 캐스크(cask) 위스키를 숙성하는 나무통입니다. 버번위스키를 담았던 통에서 숙성하면 꿀과 바닐라, 코코넛 같은 향이, 스페인 셰리 와인을 담았던 통에서 숙성하면 견과류나 말린 과일 같은 진한 향이 납니다.
가게 이름에 피트로 이름난 섬 '아일라'가 들어 있지만 선반에는 맥캘란, 글렌그란트, 발베니, 글렌모렌지 같은 익숙한 이름도 있고 위스키가 아닌 코냑 올드 바틀도 잔으로 있습니다. 향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평소 좋아하는 술이나 음식 이야기로 시작해도 됩니다.

처음이면 풀 한 잔보다 하프 두세 잔이 낫습니다
아일라발리는 잔을 하프 글라스로도 내주셔서 처음 온 손님에게 풀 한 잔보다 하프 두세 잔으로 비교해 보기를 권합니다. 같은 돈으로 여러 향을 맛볼 수 있고, 나란히 놓고 마셔야 차이가 잘 느껴지니까요. 사장님이 처음 온 손님께 권하는 조합은 지금 나오는 코어 라인과 같은 증류소의 올드 바틀³을 하프로 나란히 놓는 것입니다. 같은 이름의 술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해 보라는 뜻으로, 이 가게 선반에는 1960~90년대에 병입한 올드 바틀과 독립병입⁴ 위스키가 코어 라인보다 많습니다.
³ 올드 바틀(old bottle) 수십 년 전에 병에 담긴 위스키입니다. 같은 증류소, 같은 숙성 연수라도 그 시절의 원액과 블렌딩이 지금과 달라 맛의 결이 다릅니다. 병 안에서도 아주 천천히 맛이 변한다는 '올드 바틀 이펙트'를 이야기하는 수집가도 있지만, 마개를 닫은 병은 변하지 않는다는 쪽도 있어 아직 의견이 갈립니다.
⁴ 독립병입(independent bottling) 증류소가 아니라 병입 회사가 증류소에서 캐스크를 사들여 따로 숙성하고 자기 라벨로 낸 위스키입니다. 같은 증류소의 술이라도 통이나 숙성 기간이 달라 증류소 정규 제품에서는 볼 수 없는 맛이 나옵니다.
잔술로 파는 가게라 병이 비면 그 술은 끝납니다. 아일라발리는 꼭 마셔 보고 싶은 병이 있으면 오기 전에 남아 있는지 연락해 달라고 안내하고, 마음에 드는 병은 꺼내서 라벨을 보여 주시고 사진을 찍어도 된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특이하게도 다 마신 잔을 바로 치우지 않으시는데, 시간이 지나면 잔에 남은 향이 달라지니 조금 있다가 한 번 더 맡아 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니트로 받고, 물은 몇 방울씩 더해 봅니다
잔을 고른 뒤에는 어떻게 마실지 말할 수 있습니다. 얼음 없이 상온 그대로 받는 것을 니트(neat), 얼음 위에 따라 받는 것을 온더록(on the rocks)이라고 합니다. 얼음은 위스키를 차갑게 하고 녹으면서 술을 묽게 해서 맛이 부드러워지는 대신 위스키 본래의 향과 맛은 옅어집니다. 위스키 바에서 하프 잔으로 여러 향을 비교한다면 니트로 받는 편이 차이를 느끼기 쉽습니다.
니트로 마시다 너무 독하게 느껴지면 물을 몇 방울 더해 봐도 됩니다. 물을 조금 타면 향이 열린다는 말은 오래된 이야기인데, 2017년 스웨덴 린네대학 연구에서는 물을 더하면 스모키한 맛을 내는 성분이 잔 표면 쪽으로 모인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바텐더들은 향을 먼저 맡고 조금 마신 뒤 잠시 기다려 보라고 조언합니다. 위스키는 잔 안에서도 맛이 변하고, 도수가 높은 잔일수록 입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위스키 바에서 니트로 받으면 아래가 둥글고 입구가 좁은 튤립 모양 잔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넓은 몸통에서 올라온 향이 좁은 입구로 모여서 코를 대면 향이 잘 맡아지는 모양이고, 스코틀랜드에서 만든 글렌캐런 잔이 대표적입니다. 명동 숙희도 300종이 넘는 몰트·블렌디드 위스키와 꼬냑을 잔으로 내는데, 가게 이름 「숙희」가 위스키의 발음 '위—숙희'에서 왔다고 합니다. 바 테이블이 있어 혼자 오는 손님도 많은 곳입니다.

이름 대신 숫자가 붙은 초록 병도 있습니다
한남동 소코는 스카치를 중심으로 위스키 리스트를 넓게 갖춘 클래식 바입니다. 스카치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SMWS)⁵의 공식 파트너 바라서 이 단체가 병입한 위스키를 니트로 마실 수 있고, 바텐더에게 취향을 말하면 추천해 주십니다.
⁵ 스카치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Scotch Malt Whisky Society, SMWS) 1983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세워진 위스키 클럽이자 독립병입 회사입니다. 캐스크 하나에서 나온 위스키만 다른 통과 섞지 않고 병에 담고, 물을 타지 않은 캐스크 스트렝스⁶로 냅니다.
⁶ 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 숙성을 마친 위스키에 물을 타지 않고 통에서 꺼낸 도수 그대로 병에 담은 것입니다. 보통 위스키는 40~43%로 맞춰 나오지만 캐스크 스트렝스는 50%가 넘기도 해서, 물 몇 방울로 마시는 사람이 직접 세기를 맞춥니다.
SMWS 병에는 증류소 이름이 없고 '29.273' 같은 숫자가 붙어 있습니다. 점 앞의 숫자는 증류소를, 점 뒤의 숫자는 SMWS가 그 증류소에서 몇 번째로 병입한 캐스크인지를 뜻해서 29.273이라면 29번 증류소인 라프로익의 273번째 캐스크입니다. 이름을 숨기는 이유를 SMWS는 어디서 왔는지보다 잔에 담긴 맛 그대로를 즐기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라벨에는 시음단이 붙인 짧은 제목과 맛 설명이 대신 적혀 있으니, 숫자가 낯설어도 그 설명을 바텐더에게 읽어 달라고 하면 됩니다. 잔 가격은 매장에서 확인해야 하고, 소코에는 1인 10,000원의 커버차지가 있습니다. 칵테일 바의 커버차지와 첫 주문은 칵테일 바에서 처음 주문하는 법에 따로 정리했습니다.
위스키가 부담스러우면 하이볼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위스키 바가 아니어도 위스키 리스트를 길게 갖춘 칵테일 바가 있습니다. 연남동 트라이싸이클은 로얄 브라클라, 글렌모렌지, 글렌드로낙, 탈리스커 같은 스코틀랜드 싱글몰트와 대만 카발란⁷ 위스키를 잔으로도 병으로도 내고,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 말하면 맞춰 주십니다. 시그니처 칵테일에도 위스키가 자주 들어가고, 하이볼과 버번콕 같은 퀵 메뉴는 15,000원이라 위스키에 처음 손을 대기에도 부담이 적습니다.
⁷ 카발란(Kavalan) 대만 북동부 이란(宜蘭)현에 있는 증류소로, 2005년에 세워진 대만의 첫 위스키 증류소입니다. 덥고 습한 아열대 기후라 숙성 중에 증발하는 양, 이른바 엔젤스 셰어(angel's share)가 해마다 약 2%인 스코틀랜드의 두세 배에 이르고, 그만큼 짧은 기간에 진한 맛이 납니다.

청담동 르챔버도 200종이 넘는 위스키를 갖춘 칵테일 바입니다. 병으로 주문한 술은 맡겨 두었다가 다음에 와서 이어 마실 수 있고, 맨해튼과 네그로니를 미리 만들어 위스키처럼 오크통에서 약 6개월 숙성한 칵테일도 있습니다. 아일라발리에도 하이볼과 맥주가 있어서 일행 중에 위스키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어도 같이 가기 좋습니다.
예약과 휴무는 가게마다 다릅니다
위스키 바는 자리가 많지 않은 곳이 많아서 처음 간다면 예약 방법과 쉬는 날을 먼저 보는 편이 좋습니다.
| 가게 | 위스키 | 예약·휴무 |
|---|---|---|
| 아일라발리(분당) | 메뉴판 없이 취향·예산으로, 하프 잔 | 전화·인스타그램 DM 예약, 일요일 휴무 |
| 소코(한남) | 스카치 중심, SMWS 보틀 | 오후 5시 30분부터 전화로만 예약, 매일 영업 |
| 숙희(명동) | 몰트·블렌디드·꼬냑 300종 이상 | 캐치테이블 예약 |
| 트라이싸이클(연남) | 싱글몰트·카발란, 잔과 병 | 전화·인스타그램 문의, 매일 영업 |
| 르챔버(청담) | 200종 이상, 보틀 킵 | 예약 없이 방문 가능, 매일 저녁 7시 오픈 |
아일라발리는 좌석이 긴 바 테이블 하나라 여럿이 간다면 미리 연락해 달라고 안내하고, 일요일에 가고 싶다면 미리 연락해 달라고 하는데 가능 여부는 그때그때 다르다고 합니다. 숙희는 오픈 시간에 맞춰 가면 웨이팅 없이 앉을 수 있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같은 증류소의 술도 통과 시대에 따라 다른 맛이 납니다
피트를 때는 섬의 증류소와 그렇지 않은 증류소, 버번을 담았던 통과 셰리를 담았던 통, 지금 나오는 병과 수십 년 전에 병에 담긴 병, 스코틀랜드와 대만의 기후까지 위스키 한 잔에는 다양한 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아일라발리 사장님은 재미있는 병을 손님과 함께 나누고 탐구하는 곳이 되고 싶다고 가게 소개에 적으셨습니다. 위스키가 담아낸 이야기가 나에게 오기까지는 가게의 바텐더에게 "저 술은 잘 모르지만, 이런 향이 좋네요!"라고 말하면서 시작됩니다.
메뉴판 없이 어떻게 주문하는지, 올드 바틀은 무엇이 다른지, 하프 잔은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다면 가기 전에 아일라발리 페이지에서 사장님 페르소나에게 물어보세요. 가게가 미리 적어 둔 안내로 답해 드립니다. SMWS 보틀이나 커버차지가 궁금하다면 소코 페이지에서 시작해 보셔도 좋고, 소개하고 싶은 위스키 바가 있다면 추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