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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노미란? 서서 한 잔 하는 일본 술집 문화, 그리고 서울의 선술집

의자 없는 술집에 처음 들어가면 어디에 서야 할지, 한 잔만 마시고 나가도 되는지부터 망설여집니다. 타치노미는 일본말로 '서서 마시는 술집'이고, 우리말로는 선술집입니다. 일본에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방식이고, 서울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늘고 있습니다.

타치노미는 '서서 마시는 술집'이라는 뜻입니다

타치노미야(立ち飲み屋)는 '서다'라는 뜻의 立ち, '마시다'라는 뜻의 飲み, '가게'라는 뜻의 屋가 합쳐진 말이고 줄여서 타치노미라고 부릅니다. 의자 없이 카운터나 높은 테이블에 기대 한두 잔 하고 가는 가게를 가리킵니다.

일본에서는 술가게 앞에서 서서 마시던 습관이 술집이 됐습니다

시작은 에도 시대 술가게입니다. 당시에는 술을 달아서 사 집에 가져가 마셨는데, 사자마자 가게 앞에서 마셔 버리는 손님이 생겼습니다. 가게에 '머물며(居)' 마신다고 해서 이를 '이자케(居酒)'라고 불렀고, 오늘날 이자카야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처음의 이자카야는 간판 하나만 건 단순한 가게였고, 장인이나 가마꾼처럼 일하는 손님들이 대부분 서서 마셨습니다.

술가게 한쪽에서 서서 마시는 방식은 가쿠우치(角打ち)라고 부릅니다. 이름은 네모난 되의 모서리에 입을 대고 마셨다는 데서 왔다는 설과 가게 모퉁이에서 마셨다는 데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1694년 무사 호리베 야스베에가 결투에 나가기 전 지금의 도쿄 와세다에 있는 술가게에서 됫술을 들이켰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만큼 오래된 풍경입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제철소와 탄광이 많던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에서 크게 퍼졌습니다. 밤샘 근무를 마친 노동자들이 아침 일찍 문을 연 술가게에 들러 한 잔 하고 집에 가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기타큐슈는 가쿠우치의 발상지로 불립니다.

에도 시대 술가게 앞에서 주인이 나무 됫박에 술을 따르고, 일꾼 차림의 남자들이 선 채로 됫박을 들어 마시는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입니다.

자리를 두지 않는 방식이라 싸고 가볍고 가까웠습니다

자리를 두지 않는 방식은 사람이 몰릴 때 더 쓸모가 있었습니다. 1943년 도쿄에서는 전쟁 중 혼잡을 줄이려고 의자를 두지 않는 '국민주장(国民酒場)'이 생겼고, 전후 오사카에서는 좁은 카운터에 한 명이라도 더 설 수 있게 몸을 비스듬히 돌려 서는 자세가 퍼졌습니다. 당시 인기 남성 합창단이 마이크 하나 앞에 비스듬히 겹쳐 서던 모습을 따서 이 자세를 '다크덕스'라고 불렀습니다.

타치노미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싸고, 한 잔만 해도 되고, 옆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세 가지입니다. 의자와 넓은 자리가 필요 없으니 가게는 작게 열고 술값은 낮게 받을 수 있습니다. 손님은 한 잔만 하고 나가도 눈치 볼 일이 없고, 서 있다 보면 처음 보는 옆 손님과도 말을 섞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 들어 서서 마시는 가게가 다시 유행했고, 1,000엔으로 술과 안주를 즐긴다는 '센베로'라는 말도 널리 쓰입니다. 11월 11일은 숫자 1이 사람이 줄지어 선 모습 같다고 해서 2010년에 '서서 마시는 날(立ち飲みの日)'로 정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서서 마시는 선술집이 있었습니다

선술집의 '선'은 '서다'에서 왔습니다. 널빤지로 길게 만든 상인 목로 앞에 서서 마신다고 해서 목로주점이라고도 불렀고,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린 주막에도 앉을 자리 없이 둘러서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1920년대 경성 종로통에는 골목마다 선술집이 들어섰습니다. 술 한 잔을 시키면 안주 하나가 따라 나오는 셈법이었고, 손님은 안주장에 놓인 너비아니나 빈대떡을 골라 화로에 직접 데워 먹었습니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에도 이런 선술집이 나옵니다.

선술집은 규제와 술의 변화, 앉아 마시는 문화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선술집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선술집을 카페와 같은 규칙으로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술값과 안줏값을 따로 받게 했고, 길에서 잔술을 팔던 오래된 선술집은 무허가로 몰려 변두리로 밀려났습니다.

해방 뒤 선술집은 대폿집으로 이어졌습니다. 미군이 쓰고 버린 드럼통을 세워 가운데에 연탄을 넣고 식탁으로 썼는데, 의자 없이 둘러서서 안주를 구워 먹는 모습이 선술집 그대로였습니다. 1962년 신문에 "서울의 밤은 대폿집부터 시작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1960년대 서울 골목의 대폿집에서 연탄불을 넣은 드럼통을 식탁 삼아 남자들이 둘러서서 고기를 굽고 큰 사발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입니다.

1965년 양곡관리법으로 쌀 막걸리를 만들 수 없게 되고 술이 희석식 소주로 바뀌면서 잔술 값만으로 가게를 꾸리기는 어려워졌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는 도시개발과 입맛 변화로 서울 중심가의 대폿집이 하나둘 문을 닫거나 족발·전골 같은 전문 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사람들이 앉아서 마시는 술집을 찾게 되면서 서서 마시는 선술집은 거의 자취를 감췄습니다. 지금 '선술집'은 허름한 대중 술집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에서 다시 서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서울에 서서 마시는 가게가 다시 늘고 있습니다. 용산 삼각지의 스탠딩 바 키보 같은 가게가 알려졌고, 서서 커피를 마시는 에스프레소 바가 유행하면서 서서 먹고 마시는 데 대한 거리감도 줄었습니다. 일본 여행에서 타치노미를 경험하고 온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을지로, 성수, 마포처럼 술집이 모인 동네를 중심으로 늘고 있고, 1만 원 안팎의 작은 안주를 주로 냅니다.

한국의 타치노미는 일본과 조금 다릅니다. 서서만 마시는 문화가 아직 낯설어 의자나 테이블을 같이 두는 가게도 많고, 계산 방식이나 자리 규칙도 가게마다 다릅니다.

선술리즘은 서울 선술집 도장깨기입니다

이 흐름을 한데 묶는 행사가 선술리즘(@sunsulism)입니다. 이름부터 '선술'에 '-ism'을 붙인 말장난이고, 인스타그램 소개글은 한 줄로 "대한민국 서울 선술집 도장깨기"입니다. 서울의 서서 마시는 가게를 한 잔씩 돌며 스탬프를 모으는 투어이고, 성수동 선술집 마이즈루가 꾸립니다. 참여하는 사람을 '선술리스트(Sunsulist)'라고 부릅니다.

바다 건너편에 짝이 있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후쿠오카에는 여러 타치노미를 돌며 마시는 행사 '타치노미스트(TACHINOMIST)'가 있고, 선술리즘은 이 행사와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열립니다. 가쿠우치의 본고장인 후쿠오카현과 서울 골목의 선술집이 한 달 동안 같은 놀이를 하는 셈입니다.

첫 회인 선술리즘 1은 2026년 5월 1일부터 17일까지 8곳이 참여했습니다. 가게마다 디자인이 다른 스탬프 카드를 두었고, 주최 측은 여덟 장을 모두 모으면 "2026년 남은 한 해 만사형통"이라고 내걸었습니다. 행사를 여는 글에는 "왜 술을 서서 마시냐고 물으신다면 직접 경험해 보시기를 권유합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선술집에서는 서로가 '선'을 지키며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한 공간을 공유하며 어우러집니다.

서서 마시는 술집의 '선'에 서로 지키는 '선'을 겹친 말입니다. 같은 글은 선술집을 "마시고 죽자"는 자리가 아니라 "마시면서 놀자"는 매일의 작은 축제로 소개합니다. 앞에서 본 가쿠우치의 "한 잔만 하고 간다"는 문화를 서울 말투로 옮긴 셈입니다.

선술리즘 2는 2026년 10월 30일부터 11월 22일까지 열리고 서울 선술집 10곳이 참여합니다. 일본 쪽보다 일주일 더 길게 엽니다. 참여 방법은 네 단계입니다. @sunsulism을 팔로우하고, 참여 가게에서 한 잔을 즐기고, 스탬프를 찍어 굿즈를 받고, 다음 선술집으로 옮깁니다. 한 곳만 가도 팔로우하면 굿즈를 주고, 3곳·5곳·8곳·10곳을 채울 때마다 단계별 굿즈가 더 있습니다. 혼자 돌아도, 친구와 같이 돌아도 됩니다.

가게마다 주력 술이 겹치지 않는다는 점도 도장깨기의 재미입니다. 마이즈루는 아사히, 충무로의 소와 중은 카스, 간빠맥주는 삿포로·에비스를 주로 내고, oyoyoy에서는 굴과 와인을, 아케루에서는 숙성회와 니혼슈를 고를 수 있습니다. 열 곳을 다 돌면 같은 생맥주도 가게마다 따르는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 직접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성수 마이즈루의 테이블 위, 손님들이 남긴 손글씨 메모와 스티커 사이에 거품이 두껍게 올라간 아사히 생맥주 한 잔이 놓여 있는 사진입니다.

이따갈게 지도에서 선술리즘 10곳을 볼 수 있습니다

이따갈게 지도의 '타치노미' 칩을 누르면 선술리즘 2에 참여하는 가게 10곳을 모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가기 전에 주문 방식과 쉬는 날을 확인하세요

대부분 예약 없이 가서 빈자리에 서면 됩니다. 1인 1드링크가 기본인 가게가 많고 안주는 꼭 시키지 않아도 되는 곳이 많지만, 주문은 키오스크나 테이블의 QR·NFC 태그, 카운터 등 가게마다 방식이 다르고 쉬는 날과 안주를 주문할 수 있는 시간도 다릅니다.

선술리즘처럼 여러 곳을 돌 계획이라면 각 가게 페이지에서 사장님 페르소나에게 먼저 물어보세요. 혼자 가도 괜찮은지, 한 잔만 하고 나와도 되는지, 오늘 몇 시까지 여는지를 전화 없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